(2) 내가 전원을 택한 이유
옛말에 배부르고 등따시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최소한의 경제적 조건은 바로 의식주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노후 문제가 의식주 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닌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60세 전후에 현직에서 은퇴를 하고 나면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에 직면한다.
소위 경제적 여유를 불문하고 노후 문제는 누구나 당면하는 어려운 과제이다.
많은 은퇴자들이 노년을 힘들게 보내고 있다.
심지어는 황혼 이혼을 하는 부부가 늘고 있다는 보도가 자주 등장한다.
왜 그럴까?
남편이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은 아내에게는 고문에 가깝다.
그로 인해 감정에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산다는 것은 불행이다.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지 않으면 자연히 발생하는 갈등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가족에게 필요한 존재로 계속 남을 수 있을까?
물론 그 해답은 각자의 처지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누구나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기는 어려운 것 역시 부인 못할 현실이다.
노년에 직장을 다시 얻는 것은 행운이지만 그 역시 한시적이다.
실제 우리 사회에 노인들에게 안정적인 직장은 그리 많지 않다.
또 누구는 사회 봉사 활동을 통해 사회에서 여전히 필요한 존재로 살아 간다.
바람직하지만 아무나 그런 대열에 끼는 것도 아니다.
평소에 사회적 기여를 가치있는 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하다.
은퇴 후 도시에서 사는 동안 나는 삶의 목표가 사라진 듯한 허전함을 피할 수가 없었다.
여행이나 운동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시들해졌다.
나는 이제 쓸모없는 늙은이로 죽는 날만 기다려야 하나?
늙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방안에서 즐기는 도락이나 등산도 하루 이틀이지 늘상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나는 내게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의 선택은 전원생활이라고 판단했다.
어차피 준비한 땅이니 불문곡직하고 전원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도시에서는 남의 눈이 무서워 하기 어려운 육체노동이 농사에서는 자연스럽다.
농사는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자연과의 게임이기도 하다.
매년 기후와 환경, 농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특히 남자가 농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하다.
전원농가에서 남자는 존대받는 머슴이다.
아내는 남편의 도움없이 농사를 짓기 어렵다.
자식들은 시골에 별장을 얻은 셈이니 좋아라 한다.
특히 며느리는 시부모에 대한 심리적 시집살이에서 해방된 느낌이 들 것이다.
뿐 만 아니라 시장에서 살 수도 없는 건강한 먹거리를 얻어 가니 금상첨화다.
모든 가족들이 대환영이다.
늙은 남편이지만 존재감이 확실한 권위가 인정된다.
아내만 좋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다행히 나는 두 아들 모두 결혼을 시켜 독립을 했으니 무엇을 하든 홀가분했다.
비록 적은 수입이지만 국민연금도 매월 통장에 들어왔다.
경조사 비용 정도는 감당이 되니 생활비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된다.
생활비 자체도 도시 생활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다.
어쩌면 서울에 있는 고급 아파트 관리비 보다도 적게 들 것이다.
그리고 소비 행태나 성향 자체가 도시와 달라 돈 쓸 일이 별로 없다.
궁색할 듯 하지만 그래도 돈을 벌기 위해 귀농하는 경우에 비하면 배부른 측에 속한다.
귀농자들이 겪는 경제적 부담은 없는 편이니 남보기에 팔자 좋은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노후 생활이야 말로 안분지족의 삶을 누리면 복받은 인생이다.
그러나 자기 한 몸 노년에 편안하게 살면 그만일까?
창조주가 종족 보존의 본능을 유전 인자로 심어 놓은 것은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자식들의 앞날을 염려하고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바로 부모의 마음이다.
나 역시 나와 똑 같은 전철을 밟을 자식들의 미래가 눈에 밟혔다.
내 자식들은 또 그들의 자식들을 키워내느라고 얼마나 힘이 들까?
그들도 나이가 들면 사회에서 은퇴해야 되는데 과연 그들의 노후는 어떻게 될까?
지금 내가 준비하는 노후가 바로 자식들의 노후 준비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전원생활의 목표를 손주들에게 맞추기로 했다.
아파트 생활에서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아이들 키우기가 아닌가 싶다.
아이들이 뛰기라도 하면 당장에 아랫 층에서 경고가 날아 온다.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아이들에게 활달한 기질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 시간이 있어야 한다.
손주 녀석들은 나를 시골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녀석들에게 시골은 따듯하고 친근한 대상이 되었다.
시골 할아버지는 그 녀석 친구들에게 자랑의 상징이다.
"할아버지, 이 참외는 누구 먹으라고 키우는 거예요?"
"우리 손주 먹일려고 키우지."
기대했던 답을 듣기 위해 같은 질문을 종종하며 손주들은 흐믓해 한다.
올 때마다 너무 신나하는 손주들의 모습을 보는 행복을 우리 부부는 만끽하고 있다.
손주들을 기준으로 하니 나무 묘목을 심어도 희망이 있다.
유실수들이 손주 녀석들과 함께 성장한다.
고루 맛보이게 하려니 여러 가지 유실수를 심었다.
말벌이 먼저 시식을 하지만 싱싱하게 농익은 복숭아를 먹을 때 손주들은 황홀한 표정이다.
약을 치지 않아 못나고 상처 투성이인 복숭아도 꿀 맛이라고 손가락까지 빨아댄다.
개량종 밤나무를 심었더니 밤송이가 왕방울이다. 손주 녀석들은 밤송이를 털면서 요란을 떤다.
심은지 5년이 넘으니 유실수들이 여기 저기에서 열매를 달고 나섰다.
매실은 또 왜 그리 큰지 모르겠다.
적당히 익어 약성이 높을 때 효소를 담기 위해 매실을 항아리에 넣으며
안식구는 그 향에 취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시장에서 족보없이 사 먹는 농산물 대신 내 손으로 기른 건강한 농산물을 자식들에게 먹인다.
제 때 익은 토마토나 참외를 밭에서 직접 따서 먹는 맛은 시장에서 묵힌 것과 같을 수는 없다.
손주 녀석들에게 촛점을 맞추면 우리 부부가 농사를 지어야 하는 동기가 충족되고도 남는다.
그리고 이미 얻은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늙어도 우리 부부는 여전히 자식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로 남아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만들어 가는 전원의 보금자리는 바로 아들들의 은퇴 후 안전 장치가 될 것이다.
자식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보험이 바로 우리네 부모의 전원생활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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